편집장의 일기

#2. 눈 큰 사슴

새해가 밝았다. 한 살 더 먹어 슬프다는 남편에게 ‘올해는 2살 더 어려지면서 시작하는 것’이라고 위로했지만, 태어난 해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며 여전히 울상이다. 반대로 초등학생인 조카는 원래대로라면 10대가 되었어야 하는데 다시 8살이 되었다며 슬퍼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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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눈 큰 사슴

새해가 밝았다.

한 살 더 먹어 슬프다는 남편에게 ‘올해는 2살 더 어려지면서 시작하는 것’이라고 위로했지만,

태어난 해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며 여전히 울상이다.

반대로 초등학생인 조카는 원래대로라면 10대가 되었어야 하는데 다시 8살이 되었다며 슬퍼했다고 한다.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12월 31일과 1월 1일 그 하루 사이에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생각한다.

끝내고 다시 시작해서, 바꾸고 싶은건 달력이 아니라 나 자신인 것이다.

 

하지만 올해는 매일을 새 날처럼 맞이해야지.

아침마다 처음 보는 세상인 듯 “햇님 안녕? 나무 안녕? 501동 안녕?”하는 리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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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나는 신생아 시절의 리아가 손을 발견한 순간을 목격했다.

리아는 자기 입에서 꺼낸 자기 주먹을 경탄스런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대체 이 맛있는 것은 무엇이고, 어쩜 이렇게 내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인지 연구하는 듯이

한참동안 주먹에 힘을 줬다 뺐다 하고 있었다.

​

아기가 몸을 탐구하는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면서 나는 새삼 생명의 힘을 느꼈다.

노력하지 않아도 스스로 심장이 뛰고, 호흡하고, 오감을 느끼게 하는 것.

많은 책에서 말하는 ‘있음 그 자체’, ‘현존’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느꼈던 순간이다.

​

아기는 태어나서 먼저 몸을 다루는 법을 배우고, 그 다음으로 점차 말하고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

몸과 말과 마음은 모두 도구일 뿐이지만, 그 도구를 통해 자아를 갖추어가고

어느 순간에는 자아 속에 마음을 가두어 스스로 한계선을 그어버린다.

나는 데미안을 수 없이 읽었지만 이제서야 알을 깨고 나오는 새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자아를 만드는 것이 인간의 첫번째 숙제였다면, 그 자아를 깨는 것은 인생 전반에 걸친 과제였다.

​

모두가 무언가 경험하기 위해 제각각의 형상을 갖추어 지구에 왔다.

그러니 삶의 목적은 태어났을 때 이미 달성된 것이다.

내가 무엇을 원하든, 가장 좋은 것을 이미 가지고 있다.

아마도 매 순간을 생생하게 경험하는 것이 좋은 삶일 것이다.

​

내 몸으로 하여금 ‘숨 쉬게’ 하고, 심장을 ‘뛰게’ 하고, 생각이 나의 것임을 ‘알게 하고’,

나의 생각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그 무언가의 의지가 없으면 몸도, 생각도, 기분도 그 어떤 나의 것도 나로서 통합될 수 없다.

​

그럼에도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해서, 평상시에는 인식할 수 없다가

사랑-기쁨, 즐거움, 감사함을 모두 포용하는-의 감정을 느낄 때,

또는 반대로 너무나 큰 좌절을 겪을 때에 불쑥 찾아오곤 한다.

나는 이걸 가지지 못해서 저걸 해야한다는 환상에 끊임없이 시달리다가도,

그 순간에는 살아있음을 자각하고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물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시간이 없다’는 환상으로 돌아가곤 하지만,

그래도 아이를 키우면서는 삶에 대한 감사함을 훨씬 더 자주 느끼고 있으니 그 또한 감사한 일이다.

​

눈 큰 사슴은 추운 날이면 난로의 온기를 찾아 내려왔다가 다시 깊은 산 속으로 고고히 사라지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영영 가버린 것은 아니다.

눈 내리는 날이면 가는 길마다 사슴 발자국이 찍힐 것이다.

​

아니면 그 사슴은 오히려 내가 걱정되어 내려와 본 것은 아닐까.

이 겨울을 지낼만큼 난로가 따뜻한지, 땔 것이 충분한지 확인하고서는

자기도 겨울을 나러 따뜻한 남쪽 나라로 내려간 건 아닐까.

바람이 누그러지고 나무에 새순이 돋아날 때쯤 돌아올 것이다. 새로 돋아난 멋진 뿔을 달고.

너는 남쪽 나라로 간 것이 아니었냐고 물으면, 큰 눈을 껌뻑이며 줄곧 여기 있었다고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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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진

이정진

경기도 광주시의 어느 산마을에서 그림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곳의 새소리와 바람 소리, 그리고 흙 내음을 퍼내어 이야기 속에 담고 싶습니다. 다섯 살 딸아이와 친구들이 저의 첫 번째 독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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