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쉿, 세상의 구석으로 숨어보세요》는 지미 리아오가 2002년부터 대만 주간지 『일주간』(壹週刊)에 연재한 칼럼을 모아 처음으로 엮은 책이다.
지미 리아오는 자서전에서 당시 칼럼의 주제를 정해 두고도 매주 무엇을 그리고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고 회고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종이를 펼치고 연필을 쥐면 손이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 과장하자면, 마치 신의 말을 받아 전하는 무당과도 같았다고 한다. 다음은 그의 자서전에서 발췌해 옮긴 글이다.
나는 숲, 풀밭, 바위, 흐르는 물, 호수, 낙엽, 꽃, 풍선, 집, 도로, 그리고 그 사이를 걸어가는 아이를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내 현실에는 없는 온갖 풍경을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저 멀리 있다. 나는 마음 내키는 대로 끄적일 수 있는 배경과, 할 일 없이 쓸쓸한 얼굴을 한 아이를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아주 커다란 동물이 눈을 크게 뜨고, 그림 속에서 사랑을 필요로 하는 아이를 천진하게 바라보는 모습을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다채로운 색과 복잡하고 촘촘한 붓질로 설명할 수 없는 고독을 만들어 내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림마다 왜 그렇게 그렸는지, 인물과 환경은 어떤 기준으로 골라 어울리게 했는지, 색과 붓질과 질감에는 어떤 이치가 있는지 꼬치꼬치 묻는다면 조목조목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다만 붓을 대는 순간 어떤 ‘상태’에 들어갔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상태에서 느끼는 직관적인 감각.
2008년 봄, 그는 그동안 발표한 칼럼 작품들을 한 권의 책으로 엮기로 했다. 옷장 안에 수북이 쌓인 작품은 300여 장에 달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추리고 엮어야 할지 막막했다. 그는 그림들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처럼 더듬어 가며 한 장 한 장을 골라, 마침내 50장가량으로 추렸다.
하지만 주인공도 다르고 장면도 이어지지 않는 그림들 사이에서 하나의 이야기를 찾아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림들을 모아 삽화집 한 권을 만드는 것만으로는 창작의 갈증을 채울 수 없었다. 그는 다양한 조합을 끊임없이 시도하며, 서로 다른 그림들이 함께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형식을 찾아 나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림들 사이에 흐르는 비슷한 분위기가 눈에 들어왔다. 모든 아이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을 세상의 구석에 홀로 숨어 있는 듯했다. 그렇게 《躲進世界的角落》(세상의 구석으로 숨어들다)이라는 제목이 태어났다. 그는 다시 이 제목에서 출발해 생각을 거듭했다. 어떻게 해야 그림 한 장 한 장이 직접 나서서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이야기들이 하나의 큰 주제로 이어질 수 있을까.
《쉿, 세상의 구석으로 숨어보세요》에 등장하는 어린 소년은 지미 리아오가 기존 그림들에서 주제를 발견한 뒤 새로 그린 인물이다. 작가는 이 소년이 이야기의 중심을 잡고 서로 다른 장면들을 이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그림을 연결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 확신하기 어려웠고, 새로운 창작법을 두고 의견을 나눌 사람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그는 ‘일단 해 보자’는 마음과 ‘이 방식이 맞다’는 믿음을 함께 품고 작업을 이어 갔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그림책이라는 장르 안에서 이루어진 꽤 대담하고 실험적인 시도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지미 리아오의 전작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작가는 《내 잘못은 모두 어른들 잘못》이 ‘권위에 대한 아이의 저항’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했으며, 《실낙원》에서는 체제에 대한 저항을 그리고자 했다고 설명한다. 두 책에는 모범생도, 착한 아이도 등장하지 않는다. 《실낙원》이 결핍을 안고 부서진 주인공들을 통해 모두에게 ‘정상’이기를 요구하는 세상에 항의한다면, 《내 잘못은 모두 어른들 잘못》은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작품에 가깝다. 《쉿, 세상의 구석으로 숨어보세요》는 바로 《실낙원》에서 《내 잘못은 모두 어른들 잘못》으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이 책은 2009년 제33회 대만 금정상에서 최우수 그림책상을 받았으며, 대만 행정원 신문국이 선정한 제31차 ‘우수 과외 읽을거리’ 그림책 분야에도 이름을 올렸다. 포르투갈어판은 국가독서계획(PNL2027) 추천 도서로 선정됐다. 이탈리아 일간지 『라 레푸블리카』의 「Robinson」은 이 책을 “자신을 위한 공간을 찾고 자신의 내면세계를 돌보라는 분명한 초대”라고 평했다.
이 책을 편집하는 동안 우리집에도 재미있는 일화가 있었다. 일곱 살 난 딸아이가 책상 위에 펼쳐 둔 원고를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단단히 마음을 빼앗긴 모양이었다. 소년이 거칠게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서는 첫 장면이었다.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이 집을 안 좋아한다고 말한 적 없어요! 두 분을 싫어한다고 말한 적도 없고요! 그냥 가끔은 저도 혼자 조용히 있고 싶을 뿐이에요.”
“맞아요. 전부 제 탓이에요. 그렇겠죠. 어차피 어른들은 절대 틀릴 리 없으니까요. 전부 우리 아이들이 문제지요. 두 분만 골치 아픈 게 아니에요. 저도 머리가 터질 것 같다고요.”
소년은 정말로 집을 떠나려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에게도 해야 할 일이 있어 잠시 세상의 구석으로 숨으러 간다는 그 외침이 딸아이에게는 꽤나 인상 깊었던 모양이다. 그날부터 아이는 틈만 나면 무거운 현관문을 낑낑대며 열고 나가면서 “어차피 엄마는 절대 틀리지 않잖아요!”라고 외쳤다.
나는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어처구니없기도 해서 웃었지만, 아이에게 그 문장은 세상의 온갖 소음과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독립 선언문과도 같았을 것이다. 이런 순간마다 나는 문학으로서의 그림책이 지닌 힘을 실감한다.
누구에게나 자신을 되찾기 위해 세상의 구석에 숨어야 할 때가 있다. 혼자 있는 시간조차 좀처럼 허락되지 않는 요즘에는 더욱 그렇다. 잠깐의 빈 시간에도 습관처럼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다 보면, 정작 자기 마음을 가만히 살필 시간은 놓치기 쉽다. 그렇게 우리는 자기 내면으로 여행하는 법을 조금씩 잊어버리는지도 모른다.
이 책을 펼치는 순간, 우리는 다시 그 길로 들어선다. 통나무 하나에 몸을 맡긴 채 무심히 강물 위를 떠가는 소년의 얼굴, 눈부시게 푸른 숲속의 비밀스러운 옷장, 커다랗고 예쁜 낙서로 가득한 담벼락, 낙엽이 수북이 쌓인 수영장. 낯설고 조금은 기묘한 풍경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잊힌 기억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평범한 일상의 풍경마저 비밀스러운 모험의 순간으로 바꾸어 놓는 어린이의 시선. 그 눈동자를 카메라 삼아 찍어 낸 사진들을 들여다보는 듯하다. 그 장면들은 우리를 지친 마음이 쉬어 가던 곳으로 되돌려 놓는다. 그곳은 바로 세상의 구석, 자기 자신을 놓쳐 버린 이들을 잠시 숨겨 주고 보듬어 주는 고마운 은신처다.
이 책은 점점 더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 잠시 멈춰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 보자고 조용히 말을 건넨다. 대만에서 처음 출간된 지 십수 년이 지난 지금, 지미 리아오의 이 숨은 걸작이 우리나라 독자들에게도 마음 놓고 쉬어 갈 수 있는 작은 구석이 되어 주면 좋겠다.